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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구두를 신고 서울에서 사진을 찍자는 약속, 이게 정말 꿈이 될 수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이 소박한 한 줄이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두 소녀의 우정과 첫사랑, 그리고 그것을 조용히 짓밟는 시대의 폭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게 단순한 멜로 영화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서울의 꿈 — 산삼인 줄 알았던 독초와 두 소녀의 간절함
영화를 처음 보러 간다는 게 목숨을 걸 만한 일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을 떠올리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노래 재능이 있던 정임과 그의 단짝 순옥은 연말에 열리는 영화 상영을 보기 위해 산삼을 캐러 나섭니다. 캐서 팔면 서울까지 갈 수 있다는 계산이었죠.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아니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 장면이 웃음보다 먼저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독초인지도 모른 채 서울행 자금을 마련하려 했던 그 순수한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상영장에 몰래 들어가는 방법을 택합니다. 처음 접한 영화의 세계에 압도되며 두 사람은 약속합니다. 언젠가 반드시 서울에 가자고, 가면 예쁜 구두를 신고 사진을 남기자고. 여기서 제가 주목한 건 그 약속의 소박 함입니다. 구두 한 켤레, 사진 한 장. 지금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두 사람에게는 인생의 목표가 될 만큼 선택지가 좁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영화 서사 구조 측면에서 보면, 이 오프닝은 전형적인 '욕망 설정(desire establishment)' 장치입니다. 여기서 욕망 설정이란 관객이 주인공을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자신만의 꿈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도록 초반에 심어두는 서술 기법을 말합니다. 이 장치 덕분에 이후 닥쳐오는 비극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구조입니다. 영화의 서사 구조에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출처: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시나리오 분석 자료에서 비슷한 패턴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 산삼을 캐러 간 두 소녀 — 독초와의 혼동이 오히려 간절함을 드러내는 장치
- 몰래 들어간 상영장 — 생애 첫 영화 관람이 서울행 꿈의 기폭제가 됨
- 예쁜 구두와 사진 — 소박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약속
치매와 기억 —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다는 것
시간이 흘러 노년이 된 정임은 치매 증상을 보입니다. 내일 국민가요마당 참가를 위해 서울에 갈 준비를 하던 중에도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설정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우정 영화의 도입부에서 치매라는 단어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치매(dementia)는 단순한 건망증과 달리, 기억·언어·판단력 등 인지 기능이 전반적으로 저하되어 일상생활이 어려워지는 신경퇴행성 질환입니다. 쉽게 말해 과거의 '나'를 구성했던 모든 층위가 서서히 지워지는 병입니다. 그래서 정임이 치매를 앓는다는 설정은 단순한 슬픔 유발 장치가 아닙니다. 평생 함께한 친구와 나눈 약속, 함께 웃었던 기억, 힘든 시절을 버티게 했던 사람의 이름까지 지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순옥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생각해봤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 그 고통은 관계를 잃는 슬픔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공유했던 역사가 한쪽에서만 남겨지는 외로움이기도 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설정은 기억이 개인의 것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온 기억은 둘이 동시에 기억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인데, 한 사람이 잊으면 나머지 한 사람만 그 무게를 혼자 감당해야 하니까요. 치매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출처: 국립중앙의료원 치매중앙센터(NIA)에서 관련 연구 자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치매를 슬픔을 극대화하는 연출 장치로만 사용하는 방식에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인물도 현재의 삶에서 감정을 느끼고 관계를 맺는 존재입니다. 정임이 과거를 얼마나 기억하느냐보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느끼는지도 함께 그려져야 인물이 온전하게 살아난다고 봅니다.
일제강점기 — 평범한 꿈조차 꾸기 어려웠던 시대의 폭력
이야기는 60년 전 과거로 돌아갑니다. 청년 두영과 정임의 운명적인 첫 만남, 그리고 두영이 정임과 순옥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는 장면. 제가 이 부분에서 유독 멈췄던 건, 문해력(literacy)이 단순히 글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문해력이란 문자를 해독하고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단순한 읽기 쓰기를 넘어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글을 알게 된 두 사람이 악보를 읽으며 노래를 더 풍부하게 표현하게 되는 과정은 배움이 한 사람의 목소리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소박한 행복 위로 일제강점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공장 취직을 빌미로 소녀들이 사라지고, 젊은이들에게 징집 통지서가 날아듭니다.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몸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정임과 순옥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화장막에 몸을 피합니다. 화장막(火葬幕)이란 시신을 화장하는 장소를 뜻하는데, 죽음의 공간이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을 지키는 피난처가 된다는 아이러니가 이 장면의 긴장감을 더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이 정임의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정임이 일본군의 새로운 타깃이 되는 설정이었습니다. 알코올 의존증(alcohol use disorder)을 가진 아버지, 즉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족의 결정이 자녀의 안전을 위협하는 구조는 당시 여성이 얼마나 취약한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알코올 의존증이란 음주에 대한 조절 능력을 잃고 신체적·심리적으로 의존 상태가 되는 질환을 말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적 폭력과 가부장적 구조가 겹쳐진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작품일수록, 피해자를 고통받는 존재로만 소비하지 않고 그들이 어떤 꿈을 가졌는지 먼저 충분히 보여주는 태도가 더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이 영화가 초반에 두 소녀의 서울 여행 약속을 심어두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고 저는 봅니다. 관객이 이들을 시대의 희생자가 아닌 한 사람의 꿈꾸는 인간으로 먼저 기억하게 만드는 장치인 것이죠.
자주 묻는 질문
Q. 여전히 찬란하게는 어떤 영화인가요?
A.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노래 재능을 가진 소녀 정임과 그의 단짝 순옥의 우정, 청년 두영과의 첫사랑을 그린 작품입니다. 단순한 멜로에 머물지 않고 시대적 폭력과 개인의 꿈이 충돌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노년의 정임이 치매를 앓는 현재 시점과 60년 전 과거가 교차하는 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Q. 정임이 치매를 앓는 설정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갖나요?
A. 단순한 슬픔 장치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이 두 사람이 함께 쌓아온 역사의 무게를 더 절실하게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느낀 건 정임의 치매보다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순옥의 외로움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는 점이었습니다.
Q. 두영이 한글을 가르쳐주는 장면이 왜 중요한가요?
A. 글을 읽지 못했던 정임과 순옥이 악보를 읽게 되면서 노래를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배움이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저는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Q. 정임이 위험에 처하는 이유가 뭔가요?
A. 알코올 의존증을 가진 정임의 아버지가 진 빚이 원인입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족의 문제가 시대적 폭력과 맞물리면서 정임이 일본군의 표적이 되는 비극이 찾아옵니다. 이 설정은 당시 여성이 가족 구조와 식민지 권력 모두에게 동시에 취약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결론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산삼을 캐러 나선 두 소녀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는지, 글을 쓰면서 조금은 정리가 됐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슬픈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이 빼앗겼던 것이 무엇인지, 즉 노래 부르고 서울에 가고 친구와 사진 한 장 남기는 평범한 선택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되묻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임과 순옥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영화를 직접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특히 두 소녀가 처음 영화를 보는 장면과 두영이 한글을 가르쳐주는 장면을 눈여겨보시면 이 이야기가 왜 단순한 멜로가 아닌지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