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모녀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영화라고 들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이건 갈등이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이야기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깊이 상처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무거웠습니다.엄마가 곁에 있어도 아이는 혼자였다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어른들이 생각하는 아이의 고민과 아이가 실제로 느끼는 고민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간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 잘 다니고 밥을 먹고 친구가 있으면 별 문제 없다고 여기는 시선, 저도 그런 시선을 받으며 자랐습니다.영화 속 이정의 상황은 그 간격을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극심한 생리통으로 약을 달라는 딸의 메시지를..
아이가 학교에 잘 다니고 밥도 잘 먹으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벌새'를 보고 나서 그 기준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처음으로 직면했습니다. 가족이 있어도 혼자인 열네 살 소녀의 이야기가 이렇게 오래 마음에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가족이 있는데 왜 이렇게 외로울까 — 가족 소외의 실체가족이 곁에 있는데도 외로울 수 있다는 말,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조금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희를 보면서 그게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은희는 1994년 대치동의 한 아파트에서 부모님, 오빠, 언니와 함께 삽니다. 겉으로만 보면 가족이 갖춰진 평범한 집입니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부모님은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오빠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 있고, 언니는 연애에 바쁘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33명이 체포되고 사전 원고 전체가 압수됐습니다. 이 사실을 처음 제대로 알았을 때 솔직히 당혹스러웠습니다. 단어를 모으는 일이 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는지, 영화 말모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무게를 조금 이해하게 됐습니다.사투리를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영화 속 조선어학회는 전국에 배포되는 잡지 광고를 통해 각자의 사투리를 적어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른바 '말모이 작전'입니다. 말모이란 말을 모은다는 뜻으로, 오늘날로 치면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 방식의 어휘 수집입니다. 여기서 크라우드소싱이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자발적으로 정보나 노동을 제공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학회가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전략이었습니다.제..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사형수를 주인공으로 한 멜로'라는 설명만 듣고 신파일 것이라 지레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서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강동원과 이나영 주연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은 두 사람의 만남이 서로의 상처를 어떻게 건드리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가 어떻게 다시 피어나는지를 아주 조용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두 사람의 만남 —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데 왜 달라질까영화의 배경을 처음 따라가다 보면 두 인물 모두 극단적인 상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형수 윤수는 어린 동생 은수와 함께 지하철에서 앵벌이를 하며 살아가다 건달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결국 동생의 죽음 이후 범죄의 세계로 흘러들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