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학교에 잘 다니고 밥도 잘 먹으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벌새'를 보고 나서 그 기준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처음으로 직면했습니다. 가족이 있어도 혼자인 열네 살 소녀의 이야기가 이렇게 오래 마음에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가족이 있는데 왜 이렇게 외로울까 — 가족 소외의 실체가족이 곁에 있는데도 외로울 수 있다는 말,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조금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희를 보면서 그게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은희는 1994년 대치동의 한 아파트에서 부모님, 오빠, 언니와 함께 삽니다. 겉으로만 보면 가족이 갖춰진 평범한 집입니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부모님은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오빠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 있고, 언니는 연애에 바쁘고..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사형수를 주인공으로 한 멜로'라는 설명만 듣고 신파일 것이라 지레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서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강동원과 이나영 주연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은 두 사람의 만남이 서로의 상처를 어떻게 건드리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가 어떻게 다시 피어나는지를 아주 조용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두 사람의 만남 —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데 왜 달라질까영화의 배경을 처음 따라가다 보면 두 인물 모두 극단적인 상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형수 윤수는 어린 동생 은수와 함께 지하철에서 앵벌이를 하며 살아가다 건달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결국 동생의 죽음 이후 범죄의 세계로 흘러들어갑니다. ..
영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에서 주인공 인영은 공연 무대 위에서 웃는 바로 그 순간, 엄마가 응급실에서 숨을 거둡니다. 마지막 인사조차 없이 혼자 남겨진 아이가 그 뒤에도 내내 웃으며 살아간다는 설정. 처음엔 그게 인영의 강인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괜찮은 척 — 웃음이 방어막이 되는 순간심리학에서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반응을 '정서적 마비(Emotional Numbing)'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정서적 마비란, 뇌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았을 때 감정 처리 자체를 잠시 차단해버리는 자기 보호 기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너무 크게 무너질 것 같아서 아예 안 느끼는 쪽을 택하는 것입니다.인영을 보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데 레시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영화 '앙'을 보기 전까지 저는 그런 질문을 真剣に 받아들인 적이 없었습니다. 재료를 정성껏 대하는 것이 실제로 맛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도쿠에라는 인물을 통해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음식을 넘어 사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까지 건드렸습니다.팥앙금 하나가 가게를 바꾼 이유일반적으로 맛있는 팥소를 만들려면 좋은 재료와 정확한 레시피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 도쿠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팥을 대합니다.그녀는 팥을 삶기 전에 먼저 귀를 기울입니다. 팥이 어떤 땅에서 자랐는지, 어떤 비와 햇빛을 받았는지를 떠올리며 재료와 대화하듯 시간을 씁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솔직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