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봤던 영화인데 엉뚱한 패러디 영상 하나 보고 나서 원작이 다시 보고 싶어진 적이 있습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딱 그랬습니다. 패션업계의 냉혹한 권력 구조를 그린 원작을 통째로 뒤집어서, 미란다의 공복(空腹)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패러디인데, 보는 내내 "이 장면이 원래 저거였는데"를 반복하다 보니 패러디를 보면서 오마주 원본을 더 선명하게 떠올리게 되더군요. 패러디가 성립하는 이유, 결국 원작의 힘좋은 패러디(parody)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원작의 구조를 해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원작의 골격을 정확하게 빌려와서 전혀 다른 내용을 끼워 넣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패러디란 기존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을 모방하되 우스꽝스럽게 변형하는 창작 기법을 말합니다. 단순히 따라 하..
한 번 웃겼다는 이유로 평생 웃겨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 《메소드연기》는 바로 그 질문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처음에는 삼각김밥 하나에 흔들리는 배우가 그냥 웃겼는데, 다 보고 나서야 웃음 뒤에 꽤 묵직한 무게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원툴 이미지'라는 감옥, 빠져나오는 게 가능할까요?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사람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였습니다. 극 중 이동휘가 연기하는 배우 '동이'는 데뷔작 하나로 이름을 알린 뒤 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작품 하나로만 소비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자리에서도, 선배들의 입에서도, 심지어 소속사 사장의 대화에서도 결국 돌아오는 건 그 작품 이야기뿐이었습니다.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원툴 이미지'입니다. 원툴 이미지란 대..
자전거를 타던 남자가 경찰에게 이유 없이 돈을 빼앗깁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해병대에서 특수요원들을 직접 훈련시켰던 교관이었습니다. 저는 이 설정만 보고 시원한 복수극을 기대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생각보다 훨씬 묵직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대가 있다면영화의 주인공 테리는 사촌 마이크의 보석금을 들고 이동하다가 부패경찰들에게 돈을 빼앗깁니다. 이게 단순한 금전 피해가 아닌 이유가 있습니다. 마이크는 과거 갱단 관련 사건에서 핵심 증인으로 나선 인물인데, 시립 교도소로 이송되면 갱단의 보복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보석금 1만 달러는 곧 사촌의 목숨과 직결된 돈이었습니다.테리가 처음 선택한 방법은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자금 출처 증명서까지 준비해서 경찰서를 찾아가고, 법원에 보석을 신청..
트로이 전쟁이 끝난 기원전 1200년경, 오디세우스는 10년을 더 바다를 떠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영웅담으로 노래되고 있었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저는 꽤 오래 멈칫했습니다. 당사자가 지금 이 순간 살아남기 위해 버티고 있는데, 그 고통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멋진 전설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 묘하게 씁쓸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제니아(Xenia): 신화 뒤에 숨겨진 고대의 경제 시스템영화를 보면서 "제우스의 법도가 무너지고 있다"는 대사가 여러 차례 나오는데, 저도 처음엔 그냥 신화적인 표현으로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건 고대 지중해 세계를 실제로 작동시켰던 사회 규범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고대 그리스에서 '제니아(Xenia)'란 이방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