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 목록을 뒤지다가 '은퇴한 킬러가 제빵사로 살아간다'는 줄거리를 보고 잠깐 멈칫했습니다. 또 이런 설정인가 싶었는데, 정작 저를 붙잡은 건 액션이 아니라 빵집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던 손으로 반죽을 치대는 장면이 주는 묘한 대비가 생각보다 오래 머릿속에 남더군요. 은퇴 킬러라는 설정, 얼마나 새로울까솔직히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은퇴 킬러(retired assassin)'라는 캐릭터 공식은 액션 장르에서 이미 수없이 반복된 클리셰(cliché)입니다. 여기서 클리셰란 장르 안에서 너무 많이 쓰여 신선함이 거의 소진된 설정이나 표현을 뜻하는데, 관객이 첫 장면만 봐도 이야기의 구조를 미리 예측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입니다.《베이커》의 주인공 마일로도 그 공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조직 내 정..
상대방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저도 가끔 그런 상상을 합니다. 그런데 영화 '초감각 커플'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타인의 생각을 읽는 남자와, 유일하게 그 능력이 통하지 않는 여자가 만나는 이야기인데, 설정보다 더 오래 남는 건 따로 있었습니다.마음을 읽는다는 것, 정말 편할까요직장에서든 가까운 사이에서든, 상대가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실제로도 괜찮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제가 한 말 때문에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 같다 싶으면, 그날 저녁에 상대방의 표정과 말투를 혼자 되짚어보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든 생각이 "저 사람 속을 딱 한 번만 읽을 수 있다면"이었습니다.'초감각 커플'의 주인공 수민은 바로 그 능력을 가진 ..
솔직히 저는 영화 제목을 보고 전형적인 좀비 생존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이러스가 퍼지고, 주인공이 식량을 구하고, 탈출하는 그 흔한 공식 말이죠.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좀비보다 아파트에 혼자 남겨진 한 사람의 42일이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먹을 것도, 안전한 공간도 있는데 사람이 무너지는 이유가 뭔지 이 영화가 꽤 선명하게 보여줬습니다. 사회적 고립이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영화 속 주인공 에이단은 바이러스가 퍼진 뒤 아파트에 홀로 갇힙니다. 처음 며칠은 솔직히 버틸 만해 보였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불편하지 않은 편이라 초반 에이단을 보면서 '이 정도면 나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거든요.그런데 며칠이 몇 주가 되고, 고립 42일째에 에이단이 삶의..
매일 얼굴을 보는 사람을 진짜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 를 보고 나서 그 물음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기억을 잃은 아내가 남편의 죽음 이후 카드 내역 하나씩을 따라가며 전혀 몰랐던 진실과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보는 내내 손에 땀이 났고, 끝나고 나서는 묘하게 불안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습니다.기억상실이라는 설정이 만드는 불안감영화는 악몽에서 깨어난 덕희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남편 준석이 곁에서 그녀를 다독이고, 두 사람은 평범하게 아침을 먹습니다. 언뜻 보면 흔한 부부의 일상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뒤로 갈수록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읽힙니다.덕희는 교통사고 이후 역행성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을 겪고 있습니다. 역행성 기억상실이란 사고나 충격 이전의 기억이 지워지는 ..